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세/정치사/중기/발칸 반도와 에게해 일대 (문단 편집) ===== 니케아 제국 ===== 한편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부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세력은 소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던 니케아를 중심으로 하는 [[니케아 제국]]이었다. 니케아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된 후 도망친 앙겔로스 왕조의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였던 [[테오도로스 1세]]였다. 테오도로스 1세는 니케아에 자리를 잡자마자 비시니아와 미시아 일대를 정리하고 아나톨리아 서부일대로 나아갔다. 같은 해에 [[알렉시오스 1세(트라페준타 제국)|알렉시오스 1세]]가 건국한 뒤 흑해안을 따라 비티니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트라페준타 제국]]을 저지하였으나, 그해 말 [[라틴 제국]]의 [[보두앵 1세(라틴 제국)|보두앵 1세]]와 포이마네논에서 격돌하여 대패했다. 행정 체제도 군대도 돈도 없는 껍데기 상태에서 급조한 군대만으로는 당연한 결과였고, 라틴 제국의 군대가 마르마라 해안가를 전부 장악하고 수도 니케아 근방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대위기였다. 구원은 뜻 밖의 방향에서 나타났다.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이 라틴 제국을 침공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의 주력을 격파하고 황제 보두앵 1세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적의 예봉이 꺾여 시간을 벌게된 테오도로스 1세는 서둘러 국가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소아시아 서부의 이오니아 지역을 통합했으며, 붕괴한 행정제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웠고, 정치와 조세의 모든 제도를 짧은 시간 내에 재건하였다. 이전 동로마 시절의 관직이 전면 복구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테오도로스의 기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205년에는 다시 라틴 제국의 위협이 닥쳤다. 2대 황제인 [[앙리(라틴 제국)|앙리]]가 아드라미티온을 점령, 다시 공세를 걸어온 것이었다. 아드라미티온 근교에서 양측은 맞붙었으나 또 패배한 니케아 측은 불가리아와 연합, 공동의 적인 라틴 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고 그 해 4월 불가리아가 후방을 침공하자 라틴 제국은 물러나게 되었다. 120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요안니스 10세가 안식한 뒤 니케아에 총대주교좌를 이전하고, 프리지아 지역을 통합하였다. 이 무렵 [[룸 술탄국]]은 또 다시 니케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으며, 테오도로스는 라오디키아, 아탈리아 등이 룸 술탄국 측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208년, 요안니스 10세가 안식한 뒤 1년 넘게 공백이던 총대주교좌에 새 총대주교로 미하일 4세를 선출하고[* 테오도로스와 [[정교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정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총대주교를 선출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교황을 이를 무시하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총대주교|라틴 총대주교좌]]를 설치했다. 결국 테오도로스와 정교회는 [[가톨릭]]과의 타협 없이 자체적으로 총대주교를 선출한다.] 새 총대주교의 주관으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1211년 전 황제이자 테오도로스 1세의 장인인 [[알렉시오스 3세]]가 니케아에 왔다. 알렉시오스 3세는 니케아 궁정에 선임황제로써 자신의 입지를 요구했는데 거부당하자 [[룸 술탄국]]으로 도주, 니케아를 칠 것을 주문했다.[* 테오도로스 1세 입장에서 본다면 거절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알렉시오스 3세는 이미 다른 사위였던 알렉시오스 5세의 뒷통수를 쳤던 경력이 있었고(물론 알렉시오스 5세가 이전부터 보인 행보에 대한 자업자득이긴 했다.) 알렉시오스 3세가 살아있을때 황제를 자칭했기에 제위를 내놓아도 목숨이 보장되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룸 술탄국의 공격 소식을 접수한 테오도로스 1세는 1200명의 [[그리스인]] 병사와 800명의 라틴인 기사대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 Ἀντιόχεια τοῦ Μαιάνδρου. 현 터키 [[아이든]] 주 쿠유자크(Kuyucak).]에서 룸 술탄국의 군대를 만난 니케아군은 고군분투 속에 적군을 격파했다. 테오도로스 1세 본인도 전장 한복판에서 분전했다. 이 때 테오도로스 1세가 룸 셀주크 술탄 카이쿠스로 1세와 [[일기토|직접 칼싸움을 벌여]] 술탄을 전사시켰다고 한다.[* 황제와 술탄의 칼싸움은 당대 역사가인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의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211년 말 안티오키아 전투로 약화된 니케아를 노리고 라틴 제국이 공격했다. 트라페준타 제국, 룸 술탄국과 협정을 맺어 니케아 제국을 고립시킨 후의 공격이었다. 린다코스 전투에서 니케아군은 라틴 군대에게 패배하였고 결국 협상의 결과로 미시아가 통째로 넘어갔으며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일부가 넘어갔다. 1212년 라틴 제국과 룸 술탄국 전선이 안정되자 테오도로스는 트라페준타 제국을 공격했다. 시노피 이서의 영토가 수복되었으며 트라페준타 측은 약체화되었다. 이후의 평화를 기회로 테오도로스는 군사력을 재건하였고, 라틴 제국과는 결혼을 빌미로 관심을 계속 돌려두다가 1220년에 라틴 제국을 향해 공세를 취했다. 1221년에는 후계자로 사위 [[요안니스 3세]]를 택했다. 지지를 확보하고 형제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유력자들을 소집하여 투표과정을 거쳤고, 이를 통과한 요안니스는 충분한 정통성과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요안니스 역시 테오도로스의 기대에 걸맞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면서 이는 테오도로스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선택이 되었다. 요안니스 3세에게 제위를 물려줄 당시 니케아 제국은 인구 300만 명의 지역강국이 되어 있었고 그가 증원한 8천 명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의 기틀이 되었다. 제위에 오른 요안니스 3세는 우선 선대 때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자신의 처숙부들인 [[알렉시오스 라스카리스]], [[이사키오스 라스카리스]]를 정리해야 했다. 이들은 요안니스 3세가 제위에 오르자 라틴 제국으로 망명해 당시 라틴 제국의 황제인 [[로베르 1세(라틴 제국)|로베르 1세]]에게 요안니스 3세를 몰아내줄 것을 요청했다.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니케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1224년 포이마네논 전투에서 요안니스 3세가 이끄는 니케아 제국군에게 참패당했다. 이때 로베르와 함께 간 두 형제는 포로로 잡혔고, 소아시아 북서부에 있던 라틴 제국의 요새 대부분이 니케아 제국으로 넘어갔다. 그 후 두 형제는 실명형에 처해졌다. 포이마네논의 승리에 고무된 요안니스 3세는 그 기세를 몰아 단숨에 소아시아 영토까지 회복한 후 마르마라 해를 건너 유럽 영토 일부까지 수복했으나, 곧 이피로스의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아드리아노폴리스를 빼앗기게 되었다. 1225년 [[안드로니코스 네스톤고스]]와 [[이사키오스 네스톤고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요안니스는 동방으로 눈을 돌렸다. 요안니스는 동방으로 눈을 돌린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수도를 니케아에서 니케아 황제의 겨울 별궁이 있던 님페온으로 옮겨버린다.[* 사실 니케아가 [[라틴 제국]]과 지척이라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전부터 님페온에서 주로 머물고 있었는데 이걸 정식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여름철에는 근처의 [[이즈미르|스미르니]]나 [[마니사|마그니시아]]에서 머물기도 했다.] [[소아시아]]의 경제적 중심지인 [[이오니아]]에 위치한 도시이자, 대 튀르크족 방어를 위한 중요한 거점이며, 동시에 황가인 바타치스 가문의 영지이기도 한 님페온으로의 천도는 니케아의 경제적 중심인 메안드로스, 에르모스, 카이스트로스의 3강(江) 유역을 중요시하며 황제의 권위를 확고히 함에 더해 [[튀르크족]]에게 더 이상의 서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황제 본인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1226~7년 곧바로 룸 술탄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 트라키시온에서 [[카이쿠바드 1세]]의 [[룸 술탄국]] 군대를 격파하여 그들을 메안드로스 계곡 상류로 쫓아내 트리폴리스를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거기에 아나톨리아의 올림포스 산에 정착한 우즈 튀르크멘족 또한 니케아-룸 술탄국 사이의 무인 지역으로 쫓아내버리는 성과를 낸다. 이후 [[1229년]]까지 카이쿠바드 1세와 요안니스 3세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다 [[몽골 제국|몽골]]에 밀린 [[호라즘 왕조]]의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아나톨리아를 침범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룸 술탄국은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고 호라즘 군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여파로 [[몽골 제국군|몽골군]]의 진격이 가속화되면서 이를 막아야되는 상황에 놓이자 니케아 제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고 마침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불가리아]]에게 패해 [[몰락]]하면서 [[유럽]] 쪽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겠다 판단한 요안니스가 받아들이면서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1241년]]이 되면서 요안니스는 곧바로 경쟁자중 하나였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피로스]]의 [[데스포티스]]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니케아]]로 초청했다. 물론 이는 그를 [[포로]]로 잡아두기 위한 계략이었고 그는 이듬해 여름에야 니케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동안 또 하나의 빅 찬스가 있었으니 바로 [[몽골 제국|몽골]]의 [[소아시아]] 침공이었다. 이 원정으로 말미암아 쾨세다 전투에서 [[룸 술탄국]]이 패배해 완전히 몰락하고 [[트라페준타 제국]]도 몽골에게 갈려나가면서 아나톨리아의 경쟁자가 둘이나 사라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 요안니스는 몽골을 경계하면서 룸 술탄국에 소수의 지원병력을 보내기도 했으나 기적같이 몽골은 룸 술탄국과 트라페준타 제국만 갈아버린채 그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니케아 제국은 몽골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요안니스는 [[불가리아 제2제국|불가리아]]로 관심을 돌렸고 역시나 몽골에게 짓밟힌데다 [[차르]] [[칼로얀]]이 죽고난 후 혼란을 겪고 있던 불가리아도 그에게 무릎을 꿇게 되어 요안니스는 [[마케도니아]]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거기에 테살로니키 제국이 항복하면서 남은건 이피로스 뿐이었는데, 이피로스의 지역 특성상 장기전이 될 것을 우려해 우호조약을 체결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테오도로스가 충동질을 일으켜 우호조약이 박살나 버렸고 이에 단단히 화가 난 요안니스가 [[1253년]]에 이들을 격파하고 이피로스가 불가리아에게서 뺏은 영토를 다시 가져간다. 테오도로스는 감옥에 갇힌 채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고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아들과 요안니스의 손녀딸이 결혼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된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아마추어의 장(물의 백작 블로그)] 이기간 동안 니케아 제국의 경제 또한 성장한 상태였다. 이는 요안니스 본인이 검소했기에 가능했다. 우선 그는 황실 직속 토지 외에는 일절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걷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아 환급해 주었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에 이런 정책이 자칫 군대를 약화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시민의 부유함이 궁극적인 국가 방위의 근본임을 알았기에 세금을 걷지 않는 대신 자신부터 검소한 생활을 하여 모범을 보였다. 단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위해서는 서로 희생하는 게 있어야 한다면서 외국에서의 사치품 수입은 일절 금지했고 자급자족 생활을 권장했으며, 요안니스 본인이 직접 농장을 운영하여 살림에 보태 썼다. 농장에서 나온 달걀을 팔아 그 돈으로 보석을 사서 작은 왕관을 만들어 공식 석상에서 아내 이레네에게 선물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황제의 검소함은 제국의 경제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몽골 제국|몽골]]의 침략으로 대부분의 경쟁자들이 힘을 잃게 되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피로스]]도 고개를 숙이면서 이제 요안니스에게 남은 것은 도시,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뿐이었다. [[라틴 제국]]은 포이마네논 전투에서 박살난 것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기에 더욱 적기였다. 실제로 1235~6년 당시 한 번 공격을 시도했다가 [[장 드 브리엔]]의 악전고투와 라틴 제국의 자리에 적성국이 생기는 것을 우려한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실패했던 적이 있었기에 더욱 절박했다. 열정적으로 원정을 준비했던 그였지만 고질적인 [[간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그는 간질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62세 였다. || [[파일:empire-of-nicaea-4287909a-c7d3-444b-8c4f-78810745075-resize-750.webp]] || || 요안니스 3세가 죽은 직후의 [[니케아 제국]], 사실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4차 십자군]] 직전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 요안니스 3세 이후 니케아 제국은 다음 황제인 [[테오도로스 2세]]는 당대 최고의 학자인 니키포로스 블렘미데스에게서 교육을 받아 문학, 신학, 과학에 관해 방대한 문헌을 집대성할 만큼 지적인 인물이었으나 아버지 요안니스 3세에게 물려받은 간질 증세로 인해 황제로서의 권력을 크게 행사하지 못했고, 콘스탄티노플만 남은 라틴 제국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대신 내치에 주력해야 했지만 간질로 인해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최대한 강력하고 무자비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본능적으로 귀족들을 불신했던 그는 그들을 최대한 무시하고 그 대신 평범한 가문 출신의 소규모 관료 집단에 의지했다. 특히 요르요스 무잘론과 그의 두 동생인 테오도로스와 아드로니코스는 테오도로스 황제에게 큰 힘이 되어줬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세계총대주교로 엄격한 금욕주의자인 아르세니오스를 임명한 것은 교회의 큰 반발을 샀을뿐더러 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꾀하던 아버지의 정책을 허물어버리는 결과를 야기했다. 외치 역시 이슬람 세력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니케아 제국을 위협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테오도로스는 이슬람 세력을 걱정할 필요 없이 불가리아 제국과 라틴 제국 전선에 집중했다. 먼저 불가리아 제국의 경우, 그는 1255년부터 1256년까지의 원정을 개시해 강화 조약을 유도했다. 1256년 불가리아 제국 차르 [[미하일 아센 1세]]가 살해되고 이듬해에 [[콘스탄틴 티흐]]라는 귀족이 차르 자리를 계승한 뒤 테오도로스의 딸 이리니와 결혼하자,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개선되었다. 또한 요안니스 바타체스의 딸 마리아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군주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아들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와의 결혼을 성사시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의 대립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런데 테오도로스는 이피로스와의 결혼 협상 도중 막바지에 결혼 조건으로 두라초와 세르비아를 요구했다. 이에 미하일 2세는 격분하여 테살로니카 공격을 준비했고 그의 선동으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도 그를 지지하고 나섰으며 마케도니아도 며칠 뒤에 가담했다. 신하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미하일 8세|미하일 팔레올로고스]]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테오도로스는 그를 싫어했고 이미 1256년 초에 그에게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이때문에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룸 술탄국 측으로 피신해서 술탄의 기독교 용병들을 지휘하여 몽골군과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로스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받고 소수 병력을 맡겼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소규모의 병력으로도 용감히 싸워 두라초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피로스의 공세를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하일은 이피로스군이 테살로니카의 성문에 이르는 걸 허용했다는 이유로 니케아에 소환되어 파문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 1258년. 테오도로스는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간질로 인한 병사로 여겨지지만, 독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맏아들 [[요안니스 4세]]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므로, 테오도로스는 요르요스 무잘론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죽은 지 불과 아흐레 뒤에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열린 황제 추도식 때 귀족들은 무잘론과 그의 형제 한 명을 제단에서 살해하고 그들의 몸을 난도질해버렸다. 곧이어 궁정 혁명이 일어났고, 귀족들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감옥에서 석방시켜 요르요스가 맡으려 했던 섭정을 대신 맡게 했다. 테오도로스 2세 치세 때 황제의 미움을 받아 견제를 받고 있었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섭정으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미하일은 요안니스 4세의 섭정단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한다. 또한 선황제에게 부당하게 의심받았다는 여론과 마그니시아의 재무성에 있던 자금을 뿌리고 국유지를 하사하는 등 미친듯이 뇌물을 뿌린 덕분에 하일은 사회 각층의 지지를 받았다. 귀족층은 물론이고 윤리적으로 까다로운 교회, 일반 신민, 심지어 요안니스 4세에게도 말이다. 이후 대관식도 못 치렀던 요안니스 4세는 같은 해 12월, 미하일과 공동황제로 대관식을 치렀다. 당연히 실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궁정의 어느 누구도 공공연하게 알고 있었다 미하일 8세로 즉위를 한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1259년 주변 국가들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미하일 2세와 시칠리아 왕국 그리고 아케아-아시나 공국, 테살리아의 연합군대를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니케아의 공동황제인 미하일 8세가 대승을 거두고 만다. 그 뒤 1261년 8월 15일에 미하일 8세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라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로마 제국을 부활시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